Kaethe Kollwitz,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 Lithograph, 1942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사랑하는 이들의 일상은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었다. 태어남이라든가 만남이라든가 싫증이라든가 넌더리라든가 이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미움과 노여움과 그리움이나 시시함, 그런 모든 것이 긴 장마철에 한무리씩 다가오던 끝없는 구름의 행렬처럼 차례로 스쳐 지나왔다. 기록영화에서 보았듯이 꽃봉오리가 움트고 꽃잎이 나오고 피어나고 활짝 피어나고 더 활짝 피어나 젖혀지면서 끝에서부터 시들어 움츠러들고 드디어는 차례로 말라 떨어져 가지 끝에 간신히 붙은 꽃잎 하나 흐느적이다가 슬로우 모션으로 나부껴 떨어지는 광경. 그리고 필름은 거꾸로 돌아가며 다시 환원된다. 이 모든 출발들은 매순간 새로 시작되는 것 같다. 나는 때때로 세기말의 그림들처럼 불안하다. 이별 또한 새로운 출발이 될 테니까. 어쩌면 그는 내게서 자기를 빼앗아갈지도 모른다.
- 황석영, 오래된 정원 中
영화는 소설을 가급적 충실히 재현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듯 이야기가 겉도는 인상을 준다. 80년대의 이야기를 2000년대의 무대에 옮겨 놓은 듯한 어색한 느낌. 한윤희를 연기하기에 염정아는 너무 도시적이고, 앙칼지다. 원작대로라면 이미 다른 세상 사람이었어야 할, 억대 복부인이 된 오현우의 어머니는 억지스럽고, 공허하나 속 깊어야 할 은결은 그저 평범한 날라리 10대로 보일 뿐이다. 게다가 "이젠 헛 것이 다 보이네"라고 혼잣말로 읊조리는 오현우의 마지막 대사는, 최악이다. 그 생뚱맞은 대사 하나가 17년의 옥살이와, 17년동안 "그 안"과 "이쪽 바깥"에서 일어난 일들 모두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출소 후의 오현우가 가졌어야 할 복잡다단한 감정과 정신상태를 지진희는 밥상머리 씬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6년 전 봄, 소설을 읽고 며칠을 앓았다. 가까운 이의 표현을 빌자면 "대학 1학년 때부터 이미 반쯤은 96학번이었던" 애늙은이 나는 이 후일담같지 않은 후일담으로부터 전해진 충격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세상 짐이란 짐은 혼자 다 짊어진 것 같았던 애늙은이 심성 탓이었는지, 민주화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치환되고 만 2000년대에의 현실 세계 속에서는 도저히 만날 수 없었던 지나간 시대에 대한 아득한 향수 탓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철없이 예민했던 감수성의 어떤 부분을 한윤희와 오현우가 슬쩍 건드린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알지 못하겠다. 어쩌면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 더 이상 가능해 보이지 않던 시절에 "안"과 "밖"으로 갈리어 보상받지 못할 한 세상을 살아낸 사람들의 삶이, 그 우직하고 불합리하고 바보같은 살아감이, 말 못하게 처연해 보였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6년 전에도 세상은 이미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실패자로 낙인 찍고 손가락질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곳이었으므로.
임상수 감독이 원작을 다소 비틀어 영화 속 주인공의 주변인물들을 마치 2007년을 살다가 타임머신을 타고 10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유형의 사람들로 그려낸 건, 한윤희와 오현우의 바보같은 삶이 오늘 세상의 패러다임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눈에 얼마나 더 바보처럼 비쳐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한 장치인 것으로 보인다. 한 편으로는 17년의 세월이 오현우와 그의 주변인들 사이에 만들어낸 간극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을 테지만,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드러내야 할 부분을 배경 설정을 통해 간단하게 눈 앞에 설명하듯 드러내어 주려 한 시도는 이야기 전체를 작위적으로 느껴지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원작이 가진 깊이와 뉘앙스를 깎아먹는 화면을 만들어내고 만다. 결코 오버하지 않는 카메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 드는 건 영화가 원작의 톤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혹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촌스러워야 빛이 날 영화를 임상수는 촌스러움의 배제에 대한 강박 탓인지, 감정 과잉을 스스로 경계한 탓인지, 지나치게 세련되게 만들어 버렸다. 영화가 마치 섹시 컨셉의 문근영을 바라보는 듯한 불편함을 다소 주는 건 아마 그래서일게다.
소설을 처음 읽을 당시 느꼈던 괴로움은 내 삶의 걍팍함을 해결할 길이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내가 원하던 삶은 현실 세계에서는 영화나 소설에 그려지는 것처럼 멋지지 않았다. 활자와 영상을 통해 전달되는 남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것과 현실 세계에서 내 삶을 살아내는 것 사이에는 17년의 옥살이가 갈라놓은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큰 간극이 놓여 있었다. 세계는 너무 거대했고 나는 꿈과 현실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을 만큼의 철은 들어 있었다. 나는 불안했고, 우울했고, 슬펐다. 그러나 나는 또한 영악하기도 했다. 감정적 동요를 자기위안에 적절히 이용할 만큼.
80년 5월 광주에서 총을 들었던 사람들은 17년 후 벗겨진 머리와 주름진 눈으로 "인생은 길고 혁명은 짧다"고 말하며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필부들이 되었다. 혹자는 동지의 돈을 떼어먹고 잠적해 버렸고, 혹자는 운동의 이력을 화려하게 포장해 "한 자리"를 꿰찼으며, 혹자는 소주잔을 기울이다 옛 동지의 멱살을 부여잡는 한량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17년을 바깥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지내다 풀려난 독거수가 있고, 15년동안 그와 함께 한 6개월을 가슴에 품은 채 자신의 한 세상을 살다 간 여자가 있다. 찬란했던 한 때의 영화를 뒤로 하고 쇠락해 버린 고도에 뒹구는 낙엽처럼 그들의 삶도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허물어져 버렸다. 시간은 모든 것을 무화시켜 버린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풀썩 스러져버린 한윤희의 육신과 같이.
그러나 사랑하는 것조차 미안해야 했던 아픈 시대에, 그네들의 시절은 가장 빛났다.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암울한 날들에 그들은 사랑했기 때문에.
오늘로부터 100년만 지나면 지금 이 순간 지구 위에서 사랑하고 싸우고 웃고 울며 살아가는 사람들 중 누구도 땅 위를 걷고 있지 않을 테지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누군가 다른 이를 사랑했던 기억은, 그 사람의 몸짓과 체취와 그 사람과 함께 한 소소한 일상사는, 육신이 스러져도 어딘가 남겨져 간직되는 것이 아닐까. 광대한 우주의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는 우리네 삶이라 해도 허공에 흩어버리기엔 안타까운 희로애락의 감정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품고 살아가기에.
. . .
내가 물이 줄줄 흐르는 홑청의 한쪽을 잡고 내밀면 당신은 군말없이 고분고분 다른 한쪽을 마주 잡아주어요. 그리고 물기 한방울 없이 힘껏 꼭 짜내지요. 다시 홑청을 펼쳐서 서로 양끝을 마주 잡고 만세를 부르듯이 위로 쳐올렸다가 뿌리치며 내리면 남은 물기가 말끔하게 빠지던 거였어요. 우리는 기다란 천을 자갈밭 위에다 펼쳐놓지요. 그러면 하얀 햇볕이 홑청 위에 가득 찹니다. 고만고만한 베갯잇도 방석덮개도 사이좋게 나란히 펼쳐두지요. 속옷들은 널찍한 바위 위에 널어두는데 바위가 햇볕에 뜨뜻미지근해져서 저절로 잘 말라요. 우리는 빨래들에게 좋은 자리는 다 내주고 모래밭으로 올라가 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었지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살림의 단순한 일상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사업이 아닌가요.
- 황석영, 오래된 정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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